설교

2018.3.25 십자가의 능력 요19:23-30

오늘은 전 세계의 크리스천들이 지키는 종려 주일입니다. 종려 주일은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지만 사실은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 오시는 길이기에 오늘은 고난이 시작되는 날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의 권유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등록을 하고 새가족 성경공부반에 들어가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데 가르치는 교사 선생님이 이 분의 성경지식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보기 위해 질문을 했습니다.

성도님, 성경은 총 몇 권으로 구성되어 있나요?” 그러자 그 남자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잘모르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성경은 총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몇명이었는지는 아시나요?” 그러자 그 남자는 그것도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두 12명입니다.라고 선생님이 말해 주었습니다.

성도님, 그러면 예수님은 누가 죽였는지는 아시나요?” 이렇게 묻자 그는 다른 질문들은 망설이다가 모른다고 대답하더니 이 질문 만큼은 아주 확신에 차서 대답을 크게 빨리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제가 분명히 압니다. 제 아내가 죽였습니다. 저는 아내로부터 내가 예수님을 죽였다라는 소리를 여러번 들었습니다. 때로는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 말을 고백하는 것도 여러번 보았습니다. 제 아내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 확실합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졌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누가 죽였을까요? 물론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군중들이 예수님을 모함해서 죽도록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군사들을 시켜 예수님을 죽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빌라도와 군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 중에는 저와 여러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을까요?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달려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라고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새로운 각오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사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사건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럴 때마다 이 사건은 내가 아는 이야기인데 왜 또 나왔지라고 말하며 그 이야기를 가볍게 생각하며 슬쩍 넘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해마다 고난 주간이 돌아올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설교를 듣고 또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설교는 들을 때마다 지겹다고 생각하며 듣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자꾸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를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출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며 죽어가시는데 그 앞에서 어떤 모습과 행동을 취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첫번째로, 군병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을 당하시며 죽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욕심만 채우며 예수님을 놀리고 있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손바닥에 못을 박고 두 발에 못을 박아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의 옷을 네 조각으로 찢어서 나누어가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속옷은 이어 붙이지 않고 위에서부터 통째로 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그것은 찢지 말고 제비를 뽑아 이기는 자가 가지자고 합의를 합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찢지 않고 한 사람이 가지기로 한 것은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증거를 합니다.

그 당시 군인들은 4명이 한 조가 되어 행동을 했습니다. 어떤 일을 수행 할 때도 4명이 한 조가 되어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달 때에도 네 명이서 그 일을 수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천이 귀했던 때이기에 옷은 더 귀했을 것입니다. 요즘이야 공장에서 덤핑으로 많이 만들어 내고 또한 얼마나 옷을 만드는 재료가 다양한가요? 너무 풍성합니다. 다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옷을 하나 만들려고 해도 많은 노력과 수고와 돈이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군인들은 이런 공짜 옷감이 생긴다는 것은 횡재를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세례요한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때 군인들이 그에게 와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할 때, 사람에게 강탈하지 말며 거짓 것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요한의 말을 통해 추측해 보면 군인들의 생활이 그렇게 여유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군인들의 삶이 힘들었기에 다른 사람들을 강탈하고 거짓 고발을 해서 다른 쪽으로 돈을 버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그런 짓을 중단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공짜의 옷감을 얻는다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더군다나 속옷은 통째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에서 이런 좋은 옷감을 얻을 수 있나요? 그러기에 그들은 가위바위보를 해서 한 사람이 그것을 가지자고 결의한 것입니다.

물론 군인들이 옷을 나누어 가진 것은 구약 성경에 이미 예언해 놓은 말씀이 응답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2218절을 보면, 네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약 천년 전에 이미 예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통과 고뇌로 죽어가시는 그 시간에 그리고 그 장소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자기들을 위한 죽음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군병들은 자기들의 욕심만 채우기에 바빴습니다. 그저 꽁짜로 얻는 옷감 때문에 좋아서 희희낙낙하며 가위바위보를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지 않으면 안되었을까요? 바로 그 십자가 밑에서 희희낙낙하고 있던 군인들의 죄를 위해서 달리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그 뿐인가요? 저와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군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경종을 울려 주시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면서 삶에서 감사하며 살고 있나요?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산다면 주님을 위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가요? 혹시 교회를 다니는 것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저 군인들처럼 희희낙낙하며 예수 때문에 무엇인가 이익을 얻기 위한 그런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겠다고 말은 하지만 혹시 주님 때문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까봐 그리고 피해를 볼까봐 두려운 마음으로 움츠리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라고 고백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고 마음에 간직하고 이런 고백을 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두번째로, 십자가 밑에 있었던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 밑에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누구였나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의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거기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을 보면 여자들만 네명이었고 남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남자를 우리는 사도 요한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있었다고 성경은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몇명이나 되었을까요? 아마 수만명 아니면 적어도 수천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군중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던 70명의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아니 그들을 제외하고라도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리고 오직 연약한 여자들 네명과 단 한명의 제자만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요?

성도 여러분! 믿는 자들은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

의리가 무엇인가요? 사전에서 의리가 무엇인가를 찾으면 이렇게 답이 나옵니다.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끼리는 서로 의리가 있어서 아주 친하게 잘 지냅니다. 그리고 어려울 때 서로 돕고 먹을 것도 서로 사주며 아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해병대를 갔다 온 사람들을 보면 장난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번 해병대면 영원한 해병대라는 구호를 부르짖으며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으나 사나 해병대의 명예를 위해 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병대를 갔다 왔다는 이유로 의리를 지킨다면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을 위해서는 죽기까지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도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삶에 고통이 찾아올 때도 나의 주시라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좋을 때는 주님이라고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배신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백혈병에 걸려서 항암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항암치료를 받다 보니 머리카락이 다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학생은 가발을 쓰고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반 몇명의 못된 친구들이 그 학생의 가발을 벗기며 놀렸습니다. 가발을 쓰면 벗기고, 쓰면 또 벗기고….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자 그 여학생은 이제 창피해서 학교에 가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괴로운 마음으로 늘 자살 할 생각만 하다 보니 병의 증세는 점점더 나빠져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2016614일날 미국의 프로리다 주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행사에는 초등학교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 모두 합해서 80여명이 참여한 삭발식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 삭발식은 1년 동안 항암 치료를 받고 돌아온 마리아 팩이라는 친구를 위해 학생들이 준비한 행사였습니다. 항암치료로 인해 머리가 다 빠진 친구가 학교에 왔을 때 자신의 모습을 창피해 할 까봐서 친구들이 자진해서 삭발하자고 나선 것입니다. 친구들이 마련한 행사를 본 마리아는 그렇게 많은 친구들이 삭발을 할 줄 몰랐다고 하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게 바로 의리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를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좋을 때는 나의 주님이지만 힘들고 어려움이 찾아오면 뒤를 돌아 보지도 않고 싹 돌아서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바라 보는 이 여인들을 보며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지만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켰던 여인들과 요한을 보면서 나도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야겠다는 결단을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의리가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용기가 없으면 믿음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또한 믿음의 용기가 없으면 의리도 지킬 수 없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 같은 사람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의리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당당하게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아리마데 요셉이 어떤 사람이었나요? 그는 공회원이었습니다. 공회원이란 산헤드린 중에 한 사람입니다. 산헤드린은 유대인들의 최고의 법기관의 역할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아주 높은 직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의 멤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만약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밝히면 자기에게 불이익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합니다. 대단한 용기의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그렇게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아계시니 자기가 하는 일을 보시기에 칭찬과 유익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결단을 내릴 수도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죽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상황에서 자기의 신분을 밝힌다는 것은 손해입니다. 그렇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런 용기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믿음의 용기와 의리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지금까지도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 지낸 멋진 사람으로 불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현장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날 오후에 나타나서 아주 중요한 일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해서 자기를 위해 준비해 놓았던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내므로 성경은 이루는 일에 일조를 했던 것입니다.

“…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53:9).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의 묘에 장사가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어떤가요? 그 사람도 공회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처음 사역을 시작하실 때 밤중에 찾아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어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자 그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는 이미 그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아리마데 요셉이 시체를 달라고 해서 장사를 지낼 때 그도 와서 같이 그 일을 했습니다. 그는 몰약과 침향을 100근쯤 가지고 왔습니다. 그 당시 몰약과 침향은 비싼 상품입니다. 그런데 그는 100근을 가져온 것입니다. 100근은 약 130 파운드 정도의 무게입니다.

침향 식물에서 얻은 기름입니다. 그것은 방부제 역할 합니다. 침향은 물량이 적어 구하기가 어렵고 값이 비쌉니다. 침향이 1g 30 정도 한다니 근을 600 g으로 치면 백근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1,700 원입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을 위해서 정말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

니고데모는 믿음의 의리가 있었습니다. 만약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자기의 산헤드린의 직분에도 위험이 따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두려워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밤중에 찾아왔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당하게 낮에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재산 전부를 드려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믿음의 의리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아리마데 요셉이나 니고데모 같은 믿음의 의리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올바로 알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자신들의 구원자이심을 확실하게 믿었던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두려움을 떨치고 주님을 위해 당당하게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런 멋진 의리의 신앙인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직접 못박히신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이야 말로 그곳에 계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전날 저녁 때까지도 예수님이 죽는 그 자리까지 따라 가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환호하던 무리들은 모두 다 적으로 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묵묵히 그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마디가 있습니다. 그것을 십자가의 7언이라고 부릅니다. 그 중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두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 말씀이 무엇인가요? 내가 목마르다,”다 이루었다입니다.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실 때 인정 많은 군병 하나가 우슬초에다 신포도주를 찍어서 입술에 대어 줍니다. 이것도 이미 구약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시편69:21).

이미 수백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극심한 목마름을 당하시고 신포도주를 마실 것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이 목마르셨을까요? 단지 육신적인 갈증으로 인해 목마름을 당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이 갈증은 바로 온 인류의 갈증입니다. 하나님과 인간들사이에 죄로 인하여 관계가 끊어졌기에 생기는 갈증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갈증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로 인해 오는 갈증인 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많이 가지지 못한 갈증으로만 생각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갈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많이 가져도 늘 마음에 무엇인가가 부족한 것같아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일이 내가 원하는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단지 이 세상에 있는 일로 인해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답답함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서 생기는 영적 갈증이라는 사실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럴 때 빨리 주님께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할 때 그런 갈증이 사라질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런 갈증을 느끼셨나요? 우리의 처지와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며 그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그런 갈증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면서 운명하셨습니다. 무엇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인가요?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의로움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에 절대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의 방법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그 의로움을 대신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죽음을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죽으셨기에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승리를 위한 죽음이십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이 바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위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온 인류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젊은 20대 청년이 병원에서 암에 걸려 죽어갑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심방을 가셨는데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목사님의 손을 붙잡고 목사님,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저는 승리를 거두고 갑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말하길 제가 죽는 것이 병원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의사나 간호사들이 찾아와서 저를 보며 안타까워하며 미안해 합니다. 어제도 내가 하루를 못 넘길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작별인사를 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나를 보고 너무 슬퍼하기에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들, 제가 죽기에 정말 안타깝다면 제 소원 하나만 들어 주세요.’ 그들이 그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세요. 내가 믿는 그 예수님을 당신들도 믿기를 원합니다. 나는 죽지만 영원히 사는 그 진리를 당신들도 얻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청년이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젊은 나이에 죽으니까 그분들이 제 전도를 받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80세나90세가 되어 죽는다면 그분들이 이렇게 안타까워 할까요? 내가 20대 이니까 그들이 내 부탁도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일찍 죽어도 하나님께로 가기에 내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승리한 인생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이렇게 당당하게 죽음을 대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신 그 죽음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단지 우리의 죽음만 승리하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삶에서도 승리하도록 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통과 실패도 십자가를 붙들 때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질병과 아픔도 십자가를 붙들 때 승리하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영어로는 It is finished입니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이 예수님이 완전하게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 때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힘을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끝까지 붙잡아 주십니다.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와 능력을 더 묵상하며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은혜를 다 맛보시길 바랍니다. 땅만 바라보면 땅엣 것만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위엣 것이 보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해 위엣 것을 보시는 눈이 열리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