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016.12.4.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님 요11:17-44

캘리포니아에 써든 캘리포니아라는 대학교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가르치는 교수 중 리처드 이스털린이라는 교수가 있는데 그 분이 70년대 중반에 이런 연구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부탄 같은 빈곤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아주 게 나왔다는 것입니다. 반면 수입이 높고 잘 사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오히려 게 나왔다는 결과였습니다. 최근 그는 한국, 중국, 칠레의 경우를 보면 지난 20 동안 일인당 국민소득이 이상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만족도는 떨어지고 있다고 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행복이라는 것이 단지 소득이 높아진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맞는것 같습니다. 물질을 많이 지고 있다고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세상에 있는 들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세상의 것을 많이 소유한 것이 행복의 척도라면 왜 일본 같은 나라에서 그렇게 자살률이 높은 것일까요? 왜 한국 같이 부유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자살을 하는 것일까요? 그러기에 사람의 행복은 어떤 물질적인 것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진정한 행복은 인류의 원자가 되시고 우리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 시는 예수님 우리 마음 가운데 함께 하시느에 따라 결정됩니다.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함께 하실 우리의 삶에 참된 기쁨이 게 됩니다. 진짜 행복이 니다. 자유함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아무리 이세상의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늘 절망 불안과 좌절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루하루 다 보면 전혀 상치 않던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고 있는 말씀을 보면 슬픈 일을 당해서 애통해 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러한 일들은 단지 그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 바로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어느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베뢰아 지방에 있는 베다니라는 곳으로 전도를 하러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슬픈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이 들어 위급하다는 소식입니다.

나사로의 병명이 무엇이었는가는 성경에서 말하지 않았기에 잘 모릅니다. 그러나 병이 들어서 예수님께 연락을 할 정도라면 아주 심각한 병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가 아퍼서 쓰러지자 나사로의 자매들은 의원을 불러서 고치려고 해 보았을 것입니다. 좋다는 약도 찾아서 먹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더 이상 그를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한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연락을 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긴박한 연락을 들으시고 나사로에게 달려갈 생각은 하지 않으시고 그곳에서 이틀을 더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함이라.”

그리고 삼일 째 되는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 “우리가 잠자고 있는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하시면서 베다니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은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고 하신다고 하시며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17절에서 보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 지났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나흘이란 4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계셨던 곳과 베다니와의 거리는 하루를 족히 걸어야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러기에 나사로가 중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예수님께 간 사람은 하루를 걸려 예수님께 도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그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루가 걸려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4일이 지난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무덤에 있은지 얼마가 되었다고 했나요? 4일입니다. 이 계산으로 한다면 연락을 가지고 예수님께 떠난 사람들이 떠나자마자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냄새가 나자 무덤에 장사를 지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리아와 마르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철석같이 의지하며 살던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나사로와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는 사실 부모 없이 3 남매가 의지하며 살던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오빠인 나사로를 특히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무척 사랑해 주셨습니다. 전도 여행을 하러 그 지역으로 지나가실 때는 그 집에 들려 그들과 함께 시간도 보내실 정도로 아끼던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기의 오라버니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예수님이 당장 달려와서 고쳐 주실 것이라고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때에 오시지 않아서 오빠가 죽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매는 둘 다 예수님에게 삐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자 두 자매가 약속이나 한것처럼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22, 32).

그러나 그들은 이런 슬픈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체험하며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도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능력을 우리의 삶에서 체험하며 살 수 있을까요? 우리의 삶에서 늘 우리를 힘들게 하고 두렵게 하는 그런 문제들 속에서 어떻게 해야 주님의 도움을 받아서 승리하며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붙잡아 주셔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불안한 이 세상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속에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요한복음113절에 보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나사로와 예수님의 관계는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이 사랑하는 자가 병이 들었나이다라고 그들이 예수님께 메시지를 보낼 때 이렇게 당당하게 보낸 것입니다. 그러니 오셔서 고쳐 주시옵소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가요? 서로 사랑하는 관계인가요? 아니면 서로 서먹서먹한 관계인가요? 그저 멀찍이서서 구경꾼과 같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예수님이 없으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가요?

친한 사이는 자주 만나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맺어진 사이입니다. 이런 사이를 친한 친구라고 부릅니다. 단짝이라는 말을 쓸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없으면 안되는 그런 사이를 말합니다.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것 같은 사이를 가장 친한 친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 주십니다. 친구는 자기 친구를 위해서 죽어 줄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로 올라 가신 것입니다. 자기의 살을 찢으시고 자기의 피를 다 우리를 위해 흘려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0:15).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노니…”(15:13-15). 할렐루야!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 주십니다. 그러기에 친구는 친구로서 받아 들일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구로서 호의를 베풀고 목숨까지 바치는데 우리는 냉냉한 마음이 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쪽에서 그 사랑을 받아 들이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와 주님 사이는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 어떤 문제가 일어나든지 당당하게 예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자가 병이 들었나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문제가 생겼나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자가 지금 고통가운데 있나이다. 그러니 빨리 오셔서 해결해 주옵소서! 아멘.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거의가 이해 타산으로 맺어진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다 못해 가족도 이해 타산으로 서로 찢어져서 원수가 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며 살 수 있나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해 타산으로 우리를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이미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으시면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그 분은 사랑해야 합니다. 그 분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분께 우리의 인생을 맡겨야 합니다. 그런 사이가 바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여러분과 주님의 관계가 이런 사랑하는 관계로 맺어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그 능력을 우리의 삶에서 체험하며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아니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닌가요?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교회만 다닌다고 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옳바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교회를 5 10년 아니 그 보다 더 오래 다닌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교회를 다닐 때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며 다닌것이 과연 얼마나 되나요? 아마 많은 세월을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 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알고만 교회를 다니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며 다녀야 합니다. 마르다의 신앙이 바로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맨발로 달려 나와 동구밖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11:22). 이때 주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나리라.” 이때도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마르다의 신앙을 케치(catch)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르다의 신앙은 아는 신앙입니다. 즉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는 신앙인입니다. 그녀는 모든 것은 압니다. 그러나 가슴으로 믿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말이 서로 엊갈리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지금 현재를 말씀하고 계시는데 마르다는 자꾸 미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르다는 현재의 주님의 능력을 믿기 보다 그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믿는 쪽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물론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는 미래는 불투명한 믿음일 뿐입니다.  마르다가 자꾸 지식적인 믿음으로 이야기 하자 예수님이 그에게 이제 지식적인 신앙이 아닌 가슴으로 믿는 믿음을 가지라고 촉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원하시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요? 현재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예수님은 촉구하십니다.

이때 마르다는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확고한 믿음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없이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나 승리를 얻지 못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없이는 늘 예수 믿는 것이 힘들다고 불평하게 됩니다. 왜 그런가요?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은 과거에 능력을 행하시던 그 능력이 오늘도 똑같이 역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미래도 동일한 능력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이런 주님을 우리가 믿으며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내가 원하는대로 즉각적으로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며 살 수 있을까요? 마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백부장을 보세요. 그는 예수님께 자기의 종을 치료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런데 감히 예수님을 누추한 자기 집으로 오시도록 할 수 없으니 말씀으로만 명령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얼마나 겸손한 마음인가요? 그 만큼 예수님을 존귀하게 대우하는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요즘은 목사님들이 별로 존경을 받지 못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한다는 것 때문에 귀히 여기며 존중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목사가 직업같이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에 갈수록 성경책은 더 많아지고 성경공부하는 시간은 더 많아지고 있지만 그 만큼 삶이나 인격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도 소중하게 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목사들을 신적인 존재로 숭배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그 만큼 은혜가 되지 못하고 자신의 신앙에 타격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늘 말씀을 대할 때마다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며 살다가 당하는 어려움은 주님께서 안타까워 하십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달려가서 슬피 우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유대인들을 보시며 비통해 하셨습니다. 비통이 무엇인가요? 아주 안타까워하며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말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타까워하시며 우셨을까요? 그것은 인간들의 슬픔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가 당하는 슬픔이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슬픔을 우리와 같이 나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왜 예수님이 비통해 하셨나요? 죽음 앞에 무능한 인간들을 보시면서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본래 인간들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하는 인생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은 원래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는 행복하게 즐기며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고자 반역을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된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를 먼저 보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보내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를 먼저 보내야 합니다. 오늘 마르다와 마리아 처럼 사랑하는 오빠를 먼저 보내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들을 보시며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슬픔을 당하며 사는 것이 안타까우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슬픈 일들을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여러분의 어렵고 힘든 일들을 다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 속에 역사해 주시고 또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어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나사로가 베로 둘려 싸인 채 무덤의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할렐루야! 이게 바로 우리 주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도 부활의 능력을 힘입고 사는 자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으며 살고 있나요? 단지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나요? 모두 가슴으로 믿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앞에 놓여 있는 모든 문제들을 주님이 모두 해결해 주시는 기적을 체험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