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2017.1.29 나는 어떤 사람인가 요11:45-53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를 가르쳐 주신 이야기가 누가 복음에 나옵니다. 이 야기에는 종류의 사람 나옵니다.(10).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도중에 갑자기 강도를 났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을 앗긴 후 거반 도록 매를 맞고 버려짐을 당해 신음하며 길거리에 누워 있습니다. 런데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자 못본척하고 피해서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자 그를 치료해 주고 주막으로 데려가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해 주었습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첫째, 거미와 같은 사람이며, 두번째로, 개미와 같은 사람이고, 세번째로, 꿀벌과 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거미를 보면 다른 곤충들이 다니는 길목에 거미줄을 쳐놓고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립니다. 그러다 먹이가 거미줄에 잽싸게 나가서 영양분을 빨아먹어 버립니다. 거미는 특별히 다른 하는 습니다. 그저 다른 곤충이 걸려들기만 기다리다가 해치는 곤충입니다.

그렇다면 개미는 떤가요? 물론 개미는 굉장히 부지런합니다. 열심히 일합니다. 개미들이 파놓은 땅굴을 보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을 해서 먹을 양식을 잔뜩 쌓아 놓습니다. 그러나 개미는 그것을 다른 것들과 나누어 먹는 법이 없습니다. 열심히 살지만 개미들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입니다.

러나 세번째로, 꿀벌이 는데, 꿀벌도 개미와 같이 부지런히 합니다. 쉬지 않고 열심히 꿀을 모아옵니다. 그런데 꿀벌은 자기들이 열심히 모은 꿀을 자기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나누어 먹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로 다시 돌아가보면 거기에도 세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산에 숨어 있다가 다른 사람들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서 사는 강도들은 거미와 같은 사람입니다. 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이득으로 삼는 사회의 암적 존재입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 살려고 하는 자들이 바로 이런 거미 같은 사람들입니다.

지난 달 12월 크리스마스 때 Rhode Island에 있는 교도소에서 수감 중이던 35먹은James Morales이라는 사람이 감옥에서 탈옥했습니다. 그리고 돌아다니며 두개의 은행을 털면서 강도짓을 하다 1월 초에 결국 잡혔습니다. 이 사람은 나쁜 짓을 한 죄로 감옥에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감옥에서 탈옥한 후에도 돌아 다니면서 강도짓을 합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사람은 있으면 안되는 사람입니다. 마치 거미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요? 그들은 마치 개미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자기 일을 하므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자기밖에 모릅니다. 무엇을 하든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돈을 벌어도 자기만을 위해 씁니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힘들게 벌었는데 어떻게 이런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느냐는 생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런 사람들로 가득 있습니다. 주변에 어려움과 고통가운데 살고 있는 이웃들이 도움을 필요로 해도 혼자 ,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번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 인종차별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니라 그는 어려운 이웃을 만나자 그를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기의 시간과 정성, 물질과 사랑을 내어주는 것을 봅니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어두움을 밝혀주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거미, 개미, 꿀벌 중에 어느 가깝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살기를 소원하시나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꿀벌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마음에 소원하며 이 말씀을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앞에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잠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전도를 하시러 다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로부터 긴급한 전보가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사로가 지금 죽게 되었으니 빨리 오셔서 그를 살려 달라는 전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시다 삼일 째 되는날 나사로를 살리러 베다니로 가십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이미 죽어서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둘 수 없기에 이미 무덤에다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오셔서 나사로의 무덤문을 열라고 하십니다. 이때 마르다가 주여! 이미 죽은지 사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납니다. 이때 마르다는 이렇게 썩은 냄새가 나는데 무덤문을 열라고 하시면 어떡게 하나요?라고 하며 예수님께 반문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무덤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크게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외치셨습니다. 이때 수의로 둘둘 말아서 쌓여 있던 나사로가 무덤문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 나오는 것입니다. 아니 이제까지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썪어서 냄새가 났습니다. 나사로의 육체는 문들어져서 형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멀쩡한 사람같이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는 정신을 잠간 잃었다 깨어나는 경우는 있습니다. 콤마에 빠져 있던 사람이 살아 나오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육신이 다 썪어서 냄새가 나는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 다 썪어버린 나사로에게 명령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이 창조하실 때 어떻게 창조하셨나요?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그 분이 물과 물이 나뉘라 하시니 윗물과 아랫물로 나뉘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와 짐승들이 있으라 하시니 있었습니다. 나무와 풀이 있으라 하시니 생겨 났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그 분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그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능력의 예수님이 죽어서 무덤에 누워 있던 나사로에게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게 바로 우리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참 답답한 일은 이렇게 똑같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다양한 생각으로 갈라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슬프게도 이렇게 똑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눈으로 보고도 그것을 믿는 사람들과 믿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똑같은 그 기적을 보고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다양한 사람들의 부류를 보면서 과연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에 속하는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난 기적을 보고 반응을 보인 첫번째 종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그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라고 증거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일을 보고 이 분이야 말로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진짜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예수님이 나사로와 같이 죽었던 사람을 살려 주시는 기적을 자주 베풀어 주시나요?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그러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자신의 삶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삽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목사님들이 교회에서 선포를 합니다. 똑 같은 능력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이 마음에 믿어집니다. 그러면 아멘 하면서 그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 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그 기적을 보고 믿었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인가요? 아니면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마음에 믿어지지 않아 맹송맹송한 사람인가요? 말씀이 마음에 믿어져서 아멘으로 받는 축복된 마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두번째 종류의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예수님의 기적을 자기들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의심을 합니다. 믿지를 못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믿었으나” 라고 한 후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라고 했습니다.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알렸다고 합니다. 알렸다는 말은 일렀다는 말로 해석을 해도 됩니다. 그들이 그 기적을 보고 너무 기뻐서 바리새인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알리러 간것일까요? 그렇게 해석을 해 보려고 하지만 그것은 너무 무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한 그 기적에 대해 알린다면 분명 더 나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알렸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고자질 하러 간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헤치는데 동조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소식을 전하자 마자 바리새인들 사이에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표적을 만들고 있으니 큰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자기들이 앞으로 더 불리해 질것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요?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 불신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믿어지나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들을 때 그 말씀이 마음에 아멘으로 받아 들여지나요? 아니면 의심이 생기나요? 이런 사람들은 삶에서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셔도 그것이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기적이라고 믿지를 못하는 사람들 입니다. 예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일들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것을 믿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은 아닌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세번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기적을 볼 때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지 아니면 손해가 될지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똑같은 기적을 보고도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느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표적이 무엇인가요? 표적이란 예수님이 메시야 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베푸신 기적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밤에 양떼를 치던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예수님이 태어나실 것이라고 예언했던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너희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2:11). 여기서 뭐라고 했나요?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 누워 있는 그것이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즉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 즉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그 분이 바로 메시야 이시라는 표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표적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표적임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느냐 아니냐만 따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이냐 아니냐를 따질 때 그 분을 믿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사는 것이 더 자기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짠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인정한다면 분명 로마 군인이 우리나라와 민족을 빼앗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로마는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망이 있었기에 자기들이 정복한 나라들의 종교는 그대로 인정해 줬습니다. 그러기에 빌라도는 예수님의 재판에 참견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종교적인 일로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기해서 잡아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희들이 알아서 재판하라고 하며 피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로마는 종교적인 일에 관련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을 인정하며 따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중심이 되어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해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위하여 어떻게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라”(11:30-31).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가야바가 분명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예수님이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는데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자나 선한자나 다 사용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쪽으로 쓰임 받아야 할까요? 선한 쪽으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와 같이 악한자로 쓰임 받아서는 안됩니다. 또한 가야바처럼 악한 쪽으로 쓰임 받아서는 안됩니다.

언제 이런 잘못된 쪽으로 쓰임 받게 되나요? 자기 욕심에 끌리면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도 자기 욕심으로 인해 예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되느냐 아니냐를 따질 때 이런 모습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에게 세 종류의 사람들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첫째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들을 직접 볼 때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두번째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세번째 종류의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기의 유익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요? 하나님은 첫번째 종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일을 볼 때마다 그 사실을 믿고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삶에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꿀벌과 같은 사람입니다. 꿀벌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기에 꿀벌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귀하신 진리의 말씀을 통해 자기도 유익을 얻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더 귀하게 사용해 주십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